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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제임스 패커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인넬 패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7월 17일 금요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제임스 패커는 1926년 7월 2일 영국 글로스터 외곽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잘것없는 하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말했다. 당시 그의 가정과 교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명목상 성공회에 가까웠으며, 패커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패커의 인생을 꾼 어린 시절의 경험은 7살 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로부터 학교운동장부터 글로스터의 번화한 런던 도로까지 도망치다 차에 부닥쳐 머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머리 쪽에 눈에 띄는 움푹 들어간 흉터를 갖고 살았다. 그런데도, 패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사고보다 패커의 인생에서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은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것이었다. 패커는 1944년 10월 22일 캠퍼스 IVF 지부가 후원하는 복음주의 봉사에 참석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제임스 패커는 학업에 열중하는 진중한 학생이었지만, 옥스퍼드에서의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패커가 C.S.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옥스퍼드에서였다. C.S.루이스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S.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1952년 리처드 백스터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를 떠난 후 학자로서의 경력을 즉시 시작하지 않고, 버밍엄 교외의 교구 목사로 3년의 임기를 지냈다.

제임스 패커는 다양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의 처음 절반은 영국에서 했고, 후에는 캐나다로 갔다. 영국에서 패커는 브리스틀의 신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에서 재직했으며, 그 기간에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국 교회의 복음적 연구를 위해 설립한 정보센터 라티머하우스의 소장이자 감독으로서 10년간 일했다. 이를 통해 패커는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패커가 1979년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대학으로 이주하면서 복음주의 교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영향력을 확대했다.

제임스 패커는 성공 윤리를 거부한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성공담이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1958년 초판)은 첫해에 2만 부가 팔렸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인쇄되었다. 2005년 타임스 잡지는 패커를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CT가 복음주의에 영향을 끼친 상위 50권의 책을 설문 조사했을 때, 제임스 패커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5위에 올랐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가 이루고자 목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공을 좇는 일을 지속해서 거부했다. 대신, 그는 타자기로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그는 평생 글과 책을 집필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다).

제임스 패커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교직을 생업으로 삼았고 학생들은 그를 교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제임스 패커를 작가이자 연사로 알고 있다.

연사로서의 패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위상과 맞먹었다. 두 분야 모두에서 그의 관용은 탁월했다. 패커에게 너무 작은 청중이나 장소는 없었고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출판 경력은 사실상 그가 모든 글 청탁을 받아준 결과였다. 그의 저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100만 부 판매)은 한 작은 복음 잡지의 편집자가 요청한 일련의 격월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한 그룹 학생들과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발행자가 소책자 제작을 요청했지만, 패커는 책을 썼다). 아마도 역사상 누구도 패커보다 다른 책에 많은 추천서와 서문을 더 많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출판물과 연설을 통해 알려진 대로 패커는 청교도 학자로 유명했지만, 그는 헌신적인 성도였으며, 기본적으로 미래의 목회자 교육 양성을 가르침에 힘썼고, 교회위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 25년간, 패커는 CT를 통해 종종 문화 비평 주제를 다루는 수필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패커가 직접 말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력을 가졌지만, 일관되게 신학자로 자신을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본 소명이 신학자라고 여긴다.

고인이 된 분이 남긴 유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측 불가능한 추론적 사후의 유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패커의 주요 유산은 그가 평생 전 세계 기독교도들과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패커가 그의 생애 동안 기독교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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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커의 첫 번째 책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변호였으며, 이것은 평생의 열정이자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패커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남았다. 패커는 성서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옹호했고, 성서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영어 표준판 성경 작업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프로젝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제임스 패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논의할 기회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큰 패커의 유산은 고향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대학생으로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의 서적을 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자유주의 추세와 공격에 직면하며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대변인으로서 패커의 행보는 일생 했던 그가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일이다. 패커는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에서의 10년간의 리더십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보며, “무오에 대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은유는 패커가 최선을 다했던 여러 이유를 설명해준다. 패커는 성경의 본질과 해석,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같은 수많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선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바라본 전통주의자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는 예레미야 6:16을 인용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책을 통해 그 오래된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패커의 삶에서 일관된 또 다른 주제는 평범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또한 그의 유산 일부이다. 패커는 자신이 어린 시절 평범함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으며, 후일 이 정신으로 청교도로서의 정체성을 키웠다.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 학자들을 위한 학문을 집필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소명은 평신도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출세 제일주의는 전혀 없었다. 제임스 패커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된 논문집의 제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학>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패커를 신학자가 아닌 신학 연구가라고 불렀을 때 패커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정하며 스스로 일반 기독교인을 위한 체계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패커는 평신도를 위한 비공식 신학적 저술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자신만의 체계적인 신학을 완성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다른 학자들처럼 괴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생 제임스 패커의 유산 중 하나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주는 패커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었다. 매 순간 그의 경건함이 드러났으며, 그의 존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의 말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가 사모한 청교도들처럼, 패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분명한 사고에 근거하고 동시에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제임스 패커는 최고의 영국 신사적 매너로 정확하게 이야기했지만, 영적인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운 좋게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 안에서 마음이 맞는 신앙의 협력자로서의 면모를 가진 패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영적 기록을 그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임스 패커의 글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과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을 나타낸다. 그의 유산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주제를 정하고, 올바른 것에 관심을 두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우선순위 목록에는 성경, 교회, 올바른 신학, 삶의 거룩함, 소명이 있었다. 패커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던 이유는 그가 적극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삶과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에 관한 열정을 모든 분야에 갖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 패커는 역설적인 사람이었다. 평생 헌신적인 성공회의 일원이었지만, 복음주의 개혁주의자 사이에서도 똑같이 수월하게 일했기 때문에 아마도 개혁주의 영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캐나다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며, 게다가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미국이었다. 패커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주요 대학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며, 교단에서도 단 한 번도 주목받는 높은 자리를 오래 맡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성향이 있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주장했으며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조용한 사람이 어떻게 유명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책이 수단이 되어 그의 생각이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기록되고 출판된 그의 힘 있는 글을 통해 기억될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책의 영향으로 인해 유명한 연사가 되었다. 글을 쓰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항상 사려 깊고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명확하며 실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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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 앞에 놓인 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패커는 거실에서 십 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화려한 강단에 서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다.

2016년 그가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 더는 글을 읽거나 자유롭게 거동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말할 수 없게 되면서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제임스 패커에게 교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일생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묘비명에 새길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Leland Ryken은 50년간 재직한 Wheaton College의 영어학과 명예 교수이다. 그는 <제임스 패커: 복음생활>[JI Packer : Evangelical Life]라는 제목의 제임스 패커의 전기를 작성했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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