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강의가 끝난 후, 학생 한 명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강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 사건을 놓고 토론했었습니다. 그 학생의 질문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당신이 포기하실 걸 이미 아셨다면... 그것을 아시는 분이 아브라함이 그런 어려운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으셨을까요?” 그날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내 가족이, 특히 자녀가 고통 받는 것을 보게 된다면 완전히 무너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실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쯤, 복음서의 그리스도 수난 이야기들을 토론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놀라운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을 이미 아셨다면, 그게 왜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인가요? 그분께서 이야기의 끝을 알고 계셨다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큰 희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나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런저런 신학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일이 조만간 나에게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 다음 해에 한 살 난 막내딸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2년간 항암치료와 골수생검을 하면서 온갖 증상을 겪었고, 우리 가족은 잠 못 드는 밤을 셀 수 없이 보냈습니다. 감사하게도 2014년에 딸아이는 암 완치 판정을 받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암과 싸우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부모가 꿈꾸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이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은 또 다른 삶의 일부가 남았습니다. 암 치료가 모두 끝났고 딸이 건강하다는 것은 더없이 기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며 상처받은 마음은 완전히 고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건강 문제나 특히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거의 자동으로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트라우마나 동정심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다시 붙일 수 없을 만큼 찢어진 마음이 남았습니다. 딸이 완치된 후에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기쁠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 이전으로는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은 기쁘지만 온전히 그렇지는 못합니다. 죽음과의 싸움에서 남은 흉터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나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틀인 감성적인 렌즈를 얻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존성(divine aseity)’와 ‘하나님의 무감정성(divine impassibility)’ 같은 교리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존하시므로 사람들의 행동이나 감정에 감성적으로 반응하실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신성(the God-ness of God)을 지켜내고자 이렇게 할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성(the person-ness of God) 또한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믿고 있듯이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면, 그분은 우리와 연결되어 느끼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한다면(요한일서 4:8), 이것은 곧 우리가 감성의 하나님(a God of emotion)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성서 곳곳에서 우리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들로 인해 감성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하셨습니다(창세기 6:5-6). 훗날, 주님은 당신의 자식 이스라엘이 다른 왕을 구할 때 배신의 고통을 느끼십니다(사무엘상 8:7). 주님은 부모로서 우리가 느끼는 그런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이 세례 받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시는 하나님(마태복음 3:17)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애원하시는 예수님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다가, 그 아들이 이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실 때 그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시고 미소 지으시는 하나님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의 본성(하나님의 아들)과 사명(메시야) 때문에, 유일무이한 대속의 고난이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완전한 사랑은 그의 신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가 받은 고통은 그의 신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실 때까지 아무도 그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의 고통과 죽음이 그만큼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딸아이가 항암치료를 받던 끔찍한 나날들이 떠오릅니다. 고무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아이의 알약을 분쇄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습니다. 알약을 담은 용기에는 위험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말을 흡입하거나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나는 이 독한 약을 사과 주스와 섞어서 한 살짜리 딸아이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아이가 뱉어버리면 이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못할 짓이었습니다. 내 자녀에게 고통을 주는 이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옳은 행동이었지만,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지금도 알약이나 바늘을 보거나 암 투병을 하는 아이를 보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시는 그 만큼, 세상에서 그 아들이 흘린 모든 고통과 눈물에 가슴이 찢어지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신학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단 한 번의 제사”(히브리서 7:27)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상처와 슬픔의 기억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딸이 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스런 치료가 딸의 생명을 구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게 두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궁극적인 증거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자신도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요 힘입니다.

물론, 복음이 마침내 승리하고 구속의 역사가 완성될 것이며, 아들이 만물을 다스리시고, 사랑이 끝까지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금요일과 부활절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이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쉽지 않았으며, 그가 아버지이시기에 힘드셨다는 것을.

니제이 굽타(Nijay K. Gupta)는 포틀랜드 신학교의 신약 부교수입니다.

번역 CT 한국판 박주현 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