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2:13–53:12

우리가 지금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역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대치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 나오는 이 네 번째 종의 노래는 출생 선포라기보다 추도사에 더 가깝습니다. 이 구절은 오실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분을 말합니다. 종의 일대기의 각 부분은 뚜렷한 목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노래는 약속된 종의 승리와 높여지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노래의 중간 부분은 그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 구체화적으로 말하는데, 한 마디로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육체적으로 그 종은 상하고 찔리고 짓밟히고 훼손될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그의 영혼은 슬픔과 고통과 고뇌로 짓눌릴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그는 거부당하고 멸시를 받고 압제를 당할 것입니다. 그의 몸과 영과 관계 모두 깨어질 것입니다. 이 측량할 수 없지만 부럽지도 않은 삶은 짧게 언급되고, 저평가되고, 보독을 당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를 상하게 하고, 고통받게 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무슨 목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그 형벌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슬픔에 잠긴 어깨는 세상의 슬픔을 짊어지는 것이며,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책감을 제거할 것이며, 그가 맞은 채찍은 우리의 치유를 가져올 것이며, 그가 배척당하고 재판받은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메시아적 예언으로서의 이 노래들은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제물을 바칠 예비된 왕-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 빌립과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이 노래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빌립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사도행전 8:26-40). 베드로는 이 노래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다 핍박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고난의 길을 구주께서 먼저 잘 걸어가셨기에 그들도 잘 견딜 것을 권면합니다(베드로전서 2:22-24).

우리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이 구절은 우리 마음 가운데 불러낼 수 있는 평온하고 목가적인 평화의 이미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예수님에 대한 끔찍한 폭력, 즉 그분을 평생 동안 슬픔과 오해와 거절을 당하도록 한 그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캐롤 속의 아기가 가져온,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평화입니다.

그의 부모가 포근하게 안고 있는 아기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는 이 종의 노래의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 즉 아버지가 아들을 일찌감치 죽음으로 내모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대부분의 인간 부모가 자녀들의 밝은 미래를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에 반해,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살리기 위해 사랑이 이끄는 죽음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이 노래는 고난을 받도록 보냄 받은 종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심지어 한 사람의 죽음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리시아 아킨스(Alicia Akins)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리폼드신학교에서 성서학을 전공 중인 신학생이며, Invitations to Abundance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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