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께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지난 삼십여 년 간 살면서 부모님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기억이 없다.

중국계 싱가포르 가정에서 이런 경우는 흔하다. 우리는 식사 시간에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서로의 근황을 묻는 말을 통해 애정을 전한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삼촌이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주로 비난하거나 허를 찌르는 것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머리가늘었네. 살쪘네. 피곤해보인다. (일반적으로 실망, 불만, 걱정, 우려가 모두 동시에 포괄되는 ‘아이고’라는 말도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어느 금요일 저녁 집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다가 주인공 에블린 왕이 영화 초반 딸 조이에게 불쑥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움찔하며 웃었다.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해야 해. 너 점점 뚱뚱해지고 있잖아.”

나와 비슷한 가정에서 이런 지적하는 화법은 감정이나 다정함 대신 관심과 염려를 전달하는 확실한 방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통제하는 언어폭력을 용인하자는 뜻은 아니다. 나는 종종 중국 가정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말이나 비관적이고 냉담한 정서에 관해 이야기해 왔다.

수년 동안, 이러한 말이 나와 우리 가정에 뿌리내리지 않기 바라며 그저 비웃거나 무시함으로써 피해 왔다. 비슷한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와 남편에게 부정적인 말을 해도 순전히 ‘애정을 담은 말’이라고 여겼다.

나는 중국 가정에서 가족 간에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결핍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나 최근에 사랑이 말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침묵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블린이 조이에게 했던 말은 날아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언어적 표현 없이도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사랑은 ‘언어의 부재’ 속에서 말과 세상 사이의 틈, 허공에 매달린 침묵 속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 (주의: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이의 공간을 꿰매는 것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관객을 유쾌하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지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중국 이민자이자 세탁소 주인인 에블린(양자경 역)을 중심으로 멀티버스가 허무주의적 망각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멀티버스를 가로지르는 ‘버스 점프’를 한다.

2022년 3월 개봉 이후, 이 영화는 미국 배우 조합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또한 작품상, 감독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모든 연기 부문을 포함해 7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폭력, 성적인 언급, 거친 언어가 영화 곳곳에 등장하지만, 가족 역학에 대한 묘사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이다. 멀티버스에서 벌어지는 에블린의 장대한 모험 중에서 그녀가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가지는 가족 구성원과의 ‘진정한 연결’이다.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과 있을 때 그녀는 무뚝뚝하고 무심하다. 딸 조이 (스테파니 수)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거칠고 까칠한 말만 내뱉는다.

에블린과 그녀의 가족 사이의 격차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점차 커진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끝없는 소음과 활동에 천천히 대항하며,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아버지 공공(제임스 홍)이 그들을 ‘행복한 가족’으로 봐줄 것이라고 장담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분명해진다.

영화가 보여주듯 현실은 왕 씨 부부에게 결코 행복하지 않다.

에블린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모두와 분리된 존재이다. 아버지 생일, 중국 춘절 파티, 조이의 여자친구 베키의 참석 여부, 세금, 그리고 갓 세탁한 세탁물이 없어진 것에 대한 대화가 정신없이 오간다.

영화의 처음 10분 동안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깨지고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 웃는 조부 투파키(알파버스에서 온 조이의 페르소나)가 화면에 나타나 난장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때 더욱 심해진다.

에블린은 곧 조부의 기원에 대해 알게 된다. 한 우주에서 에블린은 딸의 버스 점프 능력이 자신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밀어붙이고, 모든 우주에서 ‘혼돈의 에이전트’가 될 힘을 준 뛰어난 과학자였다.

“당신도 느꼈지, 그렇지? 무언가 잘못되었어.” 알파 버스에서 온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는 에블린의 진심 어린 대답이다.

세대 간 트라우마를 훌륭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전형적인 중국 가정의 깊은 곳에 묻혀 있지만 한 번도 정면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불협화음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회상 속에서 아버지가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말이 무기가 되고 죽음과 같은 침묵이 우리를 삼킬 때, 우리는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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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의 질문은 성경 전체에 울려 퍼진 인류의 절규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솟구친다. 우리는 에블린처럼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서늘한 낮에 하나님과 함께 걸을 기회가 있는 에덴동산의 존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창세기 3:8) 아무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실존주의 세계에서 정처 없이 떠다니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에블린에게 답은 조부처럼 산산조각 나는 데 있다. 한 번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에블린이 공포와 유혹을 모두 담고 있는 소용돌이치며 확장되는 블랙홀 ‘에브리싱 베이글’에 빨려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딸 조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블린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조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강한 이유도, 인내하는 것만큼 강한 감정도 없을 것이다. 베이글이 그녀를 삼켜버리려고 하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조부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에블린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너.의. 엄.마.야.”

전하려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며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사.랑.해.라고. 중국인 자녀들도 결국은 분명 부모로부터 받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에블린의 사랑의 범위와 힘에는 한계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알아차릴 수 있거나 자신이 직접 표현하고자 할 때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블린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유일한 사람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연기한 세무사 디어드리 보비어드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언어적 선포로 가득 차 있는 성경 말씀을 본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예레미야 31:3).”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애굽기 34:6).”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침묵 속에도 존재하며, 그리고 감히 덧붙이자면 끊임없이 계속된다.

‘빛나는 어둠’과의 직면

침묵은 종종 영화와 성경에서 문제가 된다. 영화 형식에서 침묵은 특정한 목적을 제공한다. 빛을 발할 수 있는 만큼 소외시킬 수도 있다.

나는 성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침묵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느낌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나는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었다.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충성스러운 사랑, 변함없는 사랑, 또는 사랑의 친절로 이해되는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단어가 확실히 말을 넘어서 언어적인 표현만으로 포함하거나 정의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신학자들은 이것을 비아네가티바(라틴어로 부정적인 방법이라는 뜻), 또는 부정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접근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개념이나 구조도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의 사랑이 무엇인지 완벽히 정의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항상 그의 인식된 부재를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침묵은 그의 임재의 표시이자 표식일 수 있다.

4세기 가파도기아 교회의 아버지 닛사의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아는 이런 접근 방식에 특권을 부여했다. <모세의 생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감각이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성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관찰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성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접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파고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

에브리싱 베이글은 일종의 비아네거티바 그 자체다. 그것은 에블린의 이해의 세계 바로 너머에 있으며,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쪽으로 끌어당기고, 모든 물질과 의미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들을 뒤집고 뒤집는다.

에블린의 캐릭터 또한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그녀는 조부와의 싸움에서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존재하는 모든 에블린이 되고 그들의 능력을 통째로 활용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회전하고 자아 감각을 잃을 정도로 버스 점프한다.

20대에 기독교 신앙을 떠나기 전까지 복음적으로 성장한 이 영화의 감독 중 한 명인 대니얼 콴은 “에블린이 소리를 지르며 모든 것을 느끼는 순간, 완전히 길을 잃고 잃어버린 순간,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잃은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블린, 베이글, 그리고 콴이 절망적인 무(無)로 향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침묵과 그의 헤세드에 기반을 둔 비아네거티바는 그와의 더 깊은 친밀감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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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 속에 사는 것은 그레고리가 ‘빛나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알 수 없음과 씨름하며, 침묵이 가지고 오는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거리감을 경험하는 동시에 이러한 느낌의 부재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레고리는 이것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된다.’라고 말한다.

모순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빛나는 어둠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어둠이며, 영혼은 믿음으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할 수 있다.”라고 미국 베일러 대학 교부학 및 역사신학과 교수 D.H.윌리엄스는 말했다.

비아네거티바를 통해 아마도 하나님의 침묵이 무엇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시편 기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헤세드에 대한 더 명확한 그림으로 인도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시편 62:1).”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2016년 영화 ‘사일런스’에 등장하는 신부 세바스티오 로드리게스와 예수님 음성과 나누는 대화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깊이 보여준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주님, 저는 당신의 침묵에 맞서 싸웠습니다.”라고 외치며 말없이 기도한다.

“나는 너의 옆에서 함께 고통받았다. 나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라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생 침묵하신다고 해도, 오늘날까지도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로드리게가 말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침묵이 사랑을 낳을 때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영화 사일런스와 비슷한 맥락의 장면이 있다. 에블린과 조부는 숨 쉬는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메마른 사막에 놓인 두 개의 회색 바위가 되었다. 들리는 대사 없이 화면에는 둘 사이의 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자막만 보인다.

언어가 부재한 이 공간에서 에블린과 조부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며 두 바위는 함께 웃기까지 한다. 코믹한 안도감을 떠나서 이 장면은 침묵이 사랑에 호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에서 따뜻한 장면 중 하나이다.

침묵은 영화 속 왕 씨 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족끼리 말을 하거나 서로에게 말을 건넬 때처럼 반가운 요소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일지라도, 조용하고 상냥한 고요함이 시작될 때 침묵은 파괴 직전에 처한 가족 관계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해결되지 않은 세대 트라우마를 통해서든, 애정 표현의 부족을 통해서든,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에블린과 필자인 나처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중국의 가정에도 사랑은 존재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삶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왕 가족이 다시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결정타는 영화 끝에 나온다. 국세청 건물 앞에서 에블린은 갑자기 레이먼드에게 키스한다. 즉흥적으로, 밝은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이 상황에서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이 있다.

혼자가 아닌 경험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인류에게 공통된 외로움과 고립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서로의 단절과 멀티버스에서 에블린의 격렬한 모험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보여준다. 허무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궁극적으로 삶을 분열시키고 분해하는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리며 우리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이다.

이것은 현존하는 인류의 투쟁과 분투, 그리고 침묵을 부정하지 않는다. 멀티버스 전체가 위태로울 때도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은 이러한 점을 뼈저리게 반영한다. 에블린은 빨래방 주차장에서 조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어.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하고 싶어.” 웨이먼드는 다양한 우주에서 에블린에게 말한다. “다른 삶이었다면 당신과 함께 빨래하고 세금을 내는 일이 정말 좋았을 텐데.”

나는 아직 부모님들이나 친척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 적어도 우리 가족의 사랑 표현은 지적하는 말과 가장 일상적인 말의 형태로 계속되는 중이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우고 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존재하는 사랑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신성한 사랑 또한 침묵을 통해서 전달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참되고 변함이 없으며, 그 안에서 나는 기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아네거티바 접근 방식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 수단을 훨씬 넘어서 내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나에게는 큰 위안을 준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이네요.” 라카쿠니 우주에서 테판야키 셰프 동료인 체드에게 에블린이 말한다. (죄송하지만, 영화를 꼭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어둠’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쁘다.

[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in English. See all of our Korean (한국어) cover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