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랑카 문화에서 운명론적 사고는 전통적 신념, 종교적 관습, 역사적 경험의 결합으로 형성된다.

스리랑카에서 우세한 종교인 불교는 인생 사건을 과거 행동에 기반하여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카르마의 렌즈를 통해 삶의사건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인이 자기 행위의 결과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운명론적인 태도를 조장할 수있다. 스리랑카의 소수 힌두교도 역시 삶의 카르마적 본질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다.

식민지 시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공동체는 삶의 사건을 운명, 신의 뜻, 예정에 귀속시킴으로써 유사한 운명론적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

1505년에 포르투갈인들이 로마 가톨릭을 스리랑카에 들여왔다. 1658년에는 칼뱅주의 신학에서 예정론을 강조한 네덜란드인들이 이 나라를 점령하였다. 식민지 시대에는 다양한 기독교 종파의 선교사들이 각자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개인이 예정론을 크게 강조하는 기독교 형태, 즉 개인의 구원이나 삶의 상황 등 특정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고 인간의 행동으로 변할 수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형태의 기독교에 노출된 경우, 운명론적 사고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이 선교적 활동에서 강조되었다면 개인들은 자기 삶의 상황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종 현지 사람을 전도할 때, 구원의 필요성과 죄에 대한 결과를 강조했다. 설교가 하나님의 심판과 개인의 행동에 따른 특정 결과의 불가피성에 중점을 둔다면 운명론적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운명의 결과라고 믿게 될 수도 있다.

싱할라어의 운명론적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karume(카르마), laba upan hati(그것이 우리가 태어나는 방식이다), bambaketu hati(신이 새긴 방식), deva kematta (신의 뜻), daiwaya (그렇게 될 운명), pera paw (과거의 죄), 그리고 purwekala paw(전생의 죄).

스리랑카의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사회정치적 및 경제적 문제에 참여하는 접근에 대해 주로 의견이 분분하며, 이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유보적이거나심지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분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그들의 신학적 관점이다. 해방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유보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스리랑카의 복음주의자들은 운명론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을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촉진하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신학적 토론에 참여해야한다. 고통과 신의 개입에 대한 미묘한 관점에 대해 대중을 교육하는 것은 운명론적인 견해에 대응하는 핵심 전략이다. 더욱 적극적인 접근방식을 장려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실제적인 노력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랑카 성경 대학 및 신학교(Lanka Bible College and Seminary)는 현지 교회들이 의도적인 조치와 단계를 밟아 그들의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일간의 세미나 시리즈를 주최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풍부한 종교적 및 사회적 신념 속에서 우리의 고통은 과거나 죄나 카르마의 결과와 복잡하게 연관되어있다는 두드러진 개념이있다. 그러나 우리가 욥기나 팔복과 같은 성경 본문에 주목하면, 고난의 심오한 의미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대안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성경적 가르침의 영역에서 고통은 징벌적인 결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인간 경험의 심오한 측면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역경에 직면하여 의미와 이해를 찾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지혜가 위로부터 내려오기를 기도한다는 믿음이 있지만, 지혜의 문헌, 특히 잠언은 다른 지혜, 즉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탐구가 필요한 또 다른 지혜를 전한다. 이는 지혜를 향한 여정에는 개인적인헌신이 필요하고 희생이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지혜를 얻는 데는 때때로 개인적인 대가가 따른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본질적으로 스리랑카의 문화적 신념과 이러한 성경 본문에서 얻은 통찰력의 대조는 고통의 다면적 성격과 변혁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으로서 지혜의 적극적인 추구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인 운명이 전부인가? 운명론이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읽어보세요. (이 특별시리즈의 추가 기사는PC 버전은 오른쪽, 모바일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in English. See all of our Korean (한국어) coverage. ]

무료 뉴스 레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