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부활 장면 묘사 가운데, 마태복음은 가장 오래된 음모론 중 하나의 탄생을 재조명한다.

부활절 아침, 여성들이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러 가는 동안, 마태복음 28:11-15은 또 다른 움직임을 강조한다: 무덤 경비병들이 주말에 있었던 일들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한다. 이후, 이들은 장로들과 상의하여, 일어난 일을 감추기로 함께 결정한다. 그들은 예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조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자신들을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할 만한 “대안적 사실들”과 함께 오늘날 음모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치러 왔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선생이 체포된 후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던 사람들이 다수의 무장 경비병과 맞서기 위해 밤에 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지 말라. 그들이 경고음을 울릴 수 있는 단 한 사람도 깨우지 않은 체, 무덤의 봉인을 떼고, 거대한 돌을 밀어내고, 예수의 시체를 옮겼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

이런 사실에 기반한 음모 버전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사실에 대한 구성 그 자체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이후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증거하는 내용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당국자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어디서 찾았을까? 왜 고의로 조작된 복음을 전하는가? 사도들의 대담함, 그들의 용기, 그들의 열심, 그들의 인내, 그리고 기독교의 엄청난 확장은 부활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당시 장로들은 아직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운을 시험해보고, 경비병들과 거래를 한다. 제안된 거짓말이 경비병들에게 위험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경비병들은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 돈이 개입되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그들의 보호를 보장했다.

장로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부정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길, 진리, 생명을 알려 하기 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머무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러므로, 마태판에 의하면, 성경 본문이 말하듯, 이런 이야기의 버전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오늘날, 즉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1세기까지 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진실을 회피하려는 이론이 계속 전파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계속 지지를 받은 것은 아마도 그들의 신뢰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경비병들의 설명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없어서, 사도 마태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서 이 설명에 대해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복음서에 언급하는 자유를 누렸다.

당신이 진실을 배제하길 원할 때는, 당신의 거짓말이나 반쪽짜리 진실이 믿을 만하거나 근거가 있을 필요는 없다. 당신의 버전은 당신의 청취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거나, 그들을 방해하는 현실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불길한 빛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로 선포된 이가 방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놀라운 기적! 충격적 사실! 그러나 환희 대신, 그들은 분노로 반응했다.

본문에 아이러니가 묻어나 있다: 토요일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칠 수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경고한 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돌 위에 인장을 붙이고 경비병들이 지킬 것을 요구한다(마태복음 27:62-66). 그들이 책임져야 했던 예방 조치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증거들로 그들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조치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의심은 정당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의 시체에 대한 불안정한 결론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관에 반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그들은 받아들일 의향이 없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무서운 일이지만, 아마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25년 전,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프리즘 잡지에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강력해 다음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것이 실제 벌어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삶의 방식을 변경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거리끼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서 종교적인 척 하면서, 메시아로 밝혀진 바로 그 사람을 거부한 지도자들의 불편함을 상상해 보라.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쌓아온 삶의 끝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식을 찾으려고 한다. 장로들은 진실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들도 부정에 함께 참여하도록 끌어들인다. 그들은 길, 진리, 생명을 알고자 하는 것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인간들은 종종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빛보다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어둠을 선호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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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9-21)

우리가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할 수 있듯이, 우리 또한 그들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은 관계, 지위, 생계, 공동체, 존엄성 및 통제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 이러한 것들이 위협을 받으면,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더 안정적인 이야기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는 사실을 찾는 것보다 자기를 정당화 할 수 있고, 보호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것의 연약함이나 속임수를 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때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너지는 퍼즐 조각들을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정보에 취약한가?

마태복음의 설명은 기독교인들이 음모론을 받아들이기 쉬운 이유를 제공한다: 부활절 아침부터, 세상의 일부 세력들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모호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세상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대안적인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이 그러하게 인정하는 것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간극에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 다른 주제에 대한 대안적 설명을 받아들일 경향이 더 적을 수 있다. 또한, 지난 수십 년 간 서구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는 기독교 감축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 창조, 공교육이나 미디어 부문에서의 다원주의 등 여러 제도들이 자신들을 정도에서 벗어나게 이끌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상황 하에서, 모든 서구 엘리트들은 부패했다는 주장이나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하는 지도자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가짜 사실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덜 조심스러워지는 유혹에 빠져들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 때문에 우쭐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며, 모든 일에 대해 우리가 더 잘 안다고 믿을 권리도 부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속임수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가정해서도 안 된다. 예수 시대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보여주듯, 풍부한 성경 지식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이 말들이 반대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주장과도 관련이 없는 다른 신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첫걸음 내딛기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동료 기독교인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일부 사람들이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사실은 진실에 대한 접근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점에서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간 적이 있다. 오늘날, 러시아 정부의 선전은 냉소주의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부, 기관, 지도자들조차 자신들의 행동을 기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 마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장로들과 경비병들은 동등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진실을 완전히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른 이들은 돈을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성서적으로 문맥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었고, 이 이슈에 대해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 역시 낮았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판단에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떤가?

만약 우리가 서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또한 진실을 접했을 때 자신의 실수로부터 회복하는 방법도 알 필요가 있다.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고백하고, 우리의 길을 변경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처방전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관점이나 지위를 강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그것들의 미묘한 차이를 고려하거나 도전하는 것까지 고려할 수 있는 확신을 제공하는 세상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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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조차 언젠가는 진리의 가장 대담한 수호자가 될 수도 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던, 예수를 따르던 최초의 제자들조차 그 현실은 계속 흔들렸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계관과 지위에 도전을 받았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같은 메시지를 세 번이나 연속해서 들어야 했다(사도행전 10:9-16). 예수의 길은 항상 쉽지 않겠지만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역시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종 노릇하지 않아야 한다(히브리서 2:15).

자신들이 만들거나 선전한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일 수 있다. 부활을 부인하는 제사장들의 맹목적인 태도는 놀랍다. 그들 스스로가 퍼뜨린 거짓말에서 어떻게 그들을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만약 마태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의 이 음모를 알고 있었다면, 경비병들 중 한 명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마태에게 이야기를 살짝 흘렸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설명하는 사건이 일어난 몇 년 후, 매우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이자 교회의 맹렬한 박해자 한 사람이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다. 자신의 종교적 지위와 특권, 그리고 과거의 세계관을 포기하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죽음들”을 겪었지만, 부활의 권능을 끝까지 증언했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세상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변화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음모론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가장 강력하게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부활의 확신을 삶으로 실천함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길 바란다.

레오 레만(Léo Lehmann)은 프랑스어 권 유럽 복음 선교망(REMEEF)의 출판 책임자이며,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프랑스어 코디네이터이다.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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