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의 절제되고 소박한 화법은 듣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 팀 켈러처럼 내뱉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한 설교자는 드뭅니다 . 16 년 동안 맨해튼의 리디머 장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급진적인 놀라움과 은혜로운 진리를 놀랍도록 단순한 문구로 풀어냈습니다 . 이러한 대표적인 문구 중 하나는 2006 년 크리스천 비전 프로젝트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익에 반하는 반체제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는가? 도시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켈러의 비전을 통해 매주 4,000명의 예배자가 네 곳의 리디머 예배당에 모였고, 교회의 사역인 Hope for New York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자선 봉사로 섬겼으며, 침례교와 오순절교계 뿐만 아니라 장로교, 이민자 지역과 맨해튼을 포용하는 교회 개척 노력에 동력을 불어넣었습니다. 50년 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도시에 대한 사랑, 자비와 정의에 대한 헌신, 이웃 사랑을 행하는 자들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팀 켈러는 새로운 도시 기독교인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2006년 겨울, 두 편의 영화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기독교와 문화 간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많은 비기독교인의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언론은 디즈니와 같은 회사가 이처럼 심오한 복음주의적 호소력(물론 내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음)을 지닌 영화를 제작한다는 사실을 우파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디즈니는 왜 동성애자 친화적인 TV 리얼리티 시리즈 웰컴 투 더 네이버 후 제작을 중단했을까요? 전문가들은 기독교인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했습니다.

동시에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복음주의 선교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엔드오브 스피어End of the Spear)는 실제 동성애자가 영화의 주연인 성 네이트 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분노했습니다. 보수적인 문화 평론가들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월드 매거진의 유진 베이트와 같은 평론가들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스크린 밖 배우들의 도덕성이 아닌 예술적 가치로 영화를 판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이콧을 촉구했습니다. 수백 개의 웹사이트에서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주요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무엇이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만드는가? 모든 배우가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죄인이 허용되고 어떤 죄인은 허용되지 않는가? 기독교인이 주류 문화 제작에 참여하려고 할 때 영적 타협이 불가피한가?

기독교인과 문화의 관계는 현재 교계에서 위기 지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점점 더 탈 기독교화되어 가는 사회 질서와 어떻게 상호 작용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통을 다시 강조하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말하며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려는 직접적인 시도를 거부합니다. 다른 이들은 문화에 적대적이지만 적극적인 행동이나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희망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은 새로운 문화에 매료되어 교회가 문화와 적대적인 관계를 재정립하기를 원합니다.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은 교리와 경험을 강조하는 반면, 재정립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복음주의 교리의 특징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변화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화에 다가가기 위해 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위 전략 중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통과 정치에 참여하는 기독교인, 효과적인 전도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주변 문화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한 접근 방식은 항상 해로움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전문성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법의 총알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법의 총알이 존재할지 의문이지만, 모든 것을 한데 엮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새롭고 이전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도시 속의 도시

저의 첫 번째 전략은 간단합니다: 더 많은 기독교인이 장기적으로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서기 300년 무렵 로마 제국의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고, 이교도들은 시골에 거주했다고 기록합니다. (실제로 이교도라는 단어는 원래 시골 출신이라는 뜻으로, 비기독교인의 동의어로 사용된 것은 이 시대부터입니다.) 서기 1세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기독교인은 도시에 모여 살았지만 시골의 대다수 인구는 이교도였습니다. 두 시대의 교훈은 도시의 인구가 기독교인일 때 인구의 대다수가 이교도일지라도 사회는 기독교적 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시가 발전하면 문화도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문화 트렌드는 도시에서 생성되어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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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문화 중심지에 살면서 예술, 비즈니스, 학계, 출판, 서비스업, 미디어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문화에 불균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17년 동안 살면서 사역하면서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미디어, 출판, 예술, 비즈니스에서 일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목격하며 계속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들은 단순히 부유하고 저명한 “상위 엘리트”가 아니라 “풀뿌리 엘리트”입니다. MTV를 만드는 것은 최고 경영진이 아니라 대학을 갓 졸업한 수많은 젊고 트렌디한 크리에이터들이며, 그들이 조직의 모든 직급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문화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인이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뜻일가요? 물론 아닙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독교인과 교회가 필요합니다. 저는 도시 목회자(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였던 고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의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특히 도시에 살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두 개의 도시: 두 개의 사랑에서 보이스 목사는 복음주의자들이 적어도 일반적 인구와 비슷한 비율로 도시에 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도시에서 기독교인들은 역동적인 반체제적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도시에서 개인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부류의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4-16).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모든 도시 안에서 우리만의 대안 도시를 이루고, 문화 속에서 대안을 제시하며 성, 돈, 권력이 어떻게 비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보여 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섹스와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세속적인 사회의 섹스 우상화와 전통 사회의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기피합니다. 이는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순결이 당연합니다. 이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결혼 밖에서는 금욕을, 결혼 안에서는 정절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복음의 모양에 갖추도록 가르칩니다. 돈과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 정의와 가난한 이들, 이민자, 경제적 또는 신체적 약자를 섬기기 위해 시간과 돈, 관계와 생활 공간을 내어 관대하게 헌신할 것을 권합니다. 권력과 관련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된 인종과 계층 간에 권력을 분산시키고 관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교회 전체와 지도층에서 점점 더 다민족화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더 넓은 문화의 가치에 반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도시 전체의 선을 위해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공동체 전체의 공익,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물질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개인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분쟁, 이기심이 아닌 정의와 평화,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도시와 이웃의 평화, 안전과 정의, 번영을 위해 일하며,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단순히 그 도시에 사는 것뿐만 아니라 그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의 샬롬, 즉 경제적, 사회적, 영적 번영을 위해 일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시민은 지상의 도시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살아갈 능력이 있는 시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세상의 삶의 패턴에 순응하지 않는 문화적 참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권력을 얻기 위해 도심으로 간다면, 더 깊숙이 연관되고 오래 지속될수록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문화적 영향력과 변화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모든 민족을 섬기기 위해 도시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힘을 찾기 위해 힘을 잃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신념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희생적인 봉사를 한다면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전략(굳이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문화권에서 기독교인의 행동은 때로는 불쾌감을 주고 공격받지만, 어떤 행동은 비기독교인에게 감동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비난할지라도 ...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 2:12, 마 5:16 참조). 중동에서는 기독교 성 윤리가 합리적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뺨을 내어주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뉴욕에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환영받지만, 기독교 성 윤리는 엄청나게 퇴행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세상에서 기존의 문화에 반하기도 하지만, 반면 비기독교 문화에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드러나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공통적 은혜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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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무조건적 비난하거나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받고 때로는 공격을 받을 것을 예상하면서 희생적으로 공익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적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직업의 세계관

공익을 위한 기독교 문화를 이루기 위해 강조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일을 일치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화는 우리의 관행과 태도, 가치, 신념의 집합이며, 사람들은 삶이 어디에서 왔는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 동안 시간을 할애할 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 “중요한 질문”을 문화를 통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도, 일을 할 수도 없으며, 모든 해답이 모여 문화를 형성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업 분야에서는 기독교와는 매우 다른 해답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일터에 가면 신앙을 봉인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일하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성경 구절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세상적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 비즈니스, 정부, 저널리즘, 엔터테인먼트, 학문에 대한 복음의 함의를 생각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지 잘 모릅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적이고 창의적이며 훌륭한 비즈니스 환경을 개발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 기쁨과 희망, 진리를 구현하는 것도 이 사역의 일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요 문화 중심지에 많이 거주하면서 탁월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사는 문화와는 다른 부류의 문화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영적인 힘을 추구했고, 그리스 사회는 지혜를 중시했습니다(고전 1:22-25). 각 문화에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우상이라고 드러난 희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지혜’이고 유대인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화는 행복한 끝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시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소망을 성취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기독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in English. See all of our Korean (한국어) cover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