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요즘 다른 우주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국 문화는 이제 어디에나 있다: 마트에서는 한국 아이돌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넷플릭스에는 한국 드라마가 줄을 잇고, 화장품 가게에는 한국 스킨케어 카테고리가 따로 있다. 심지어 미시간주 시골의 식당에서 한국식 바비큐 치킨을 파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기 있는 '한류' 문화 외에도 김치와 케이팝만큼이나 한국 문화와 삶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가 있다. 바로 한(恨)이다. 한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로 악명이 높다.

대략 정의하자면 한은 집단으로 느끼는 깊은 슬픔, 억울함, 분노이며 억압을 견디면서 형성된 감정이다.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한은 대대로 끊임없이 존재한다. 한은 잊히지 않는 복수심과 불완전함, '화병'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분노 증후군'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하고 뒤섞인 감정으로 얼룩져 있다.

'비프'에서 스티븐 연을 사로잡는 것도 한이다. 한국 입양인과 다국적 한국 시인의 대사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한의 정서이다. 우리 가족처럼 이산가족 즉, 남북한 사이의 비무장지대인 DMZ로 인해 헤어진 가족의 격렬한 감정을 온전히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한에 대한 경험이 때때로 내 신앙과 상충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어둡고 무거운 단어가 희망, 기쁨, 사랑을 상징하는 복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알고 보니 많은 관련이 있었다.

한의 역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국계 미국인 학자 마이클 신의 말에 따르면 한은 상당히 현대적인 개념이다. 한은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경향이 있는 한국 고전 문학이나 초기의 한영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자 한(恨; 원망, 미움, 후회)에서 유래한 한이 한국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혼란에 빠지면서 한의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은 한국이 세계적인 대도시로 기적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특성으로 굳어졌는데, 이 변화는 내부의 정치적 격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의 시인이자 운동가인 고은은 "우리는 한의 태에서 태어나 한의 품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인이라면 피에 한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한국계 학자 중에서는 한의 개념, 특히 오늘날 한국 내에서 한이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미주리-세인트루이스 대학의 역사학과 강민수 교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내에서 한의 문화적 중요성이 감소했으며,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이제는 무의미할 정도로" "과거의 퇴행적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이 실제로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한국계 미국인 신학자 앤드류 성 박은 한국인에게 한이 있듯이 베트남인에게도 한이 있고, 몽골인에게도 호로술이 있으며, 인도인에게도 우파나하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산드라 소희 치 김 같은 학자들은 한이 "한국과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매우 특정한 사회적, 민족적 상상을 만들어낸 한국에서의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해해야 할 중요한 개념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즉 온전함을 갈망하는 한 민족의 아픔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통합되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런 감정을 느꼈던 또 다른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과 한(恨)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앗수르와 바빌론 등 거대한 왕국 사이에 끼어 있던 고대 이스라엘은 상실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남북이 분단되어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는 것을 보았고, 여러 세대에 걸친 포로 생활과 억압의 트라우마를 겪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은 후대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평양에서 열린 부흥회였다. 캠브리지 학자인 신 교수는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기독교가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역사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907년 부흥 운동은 외지인들에게는 두려운 사건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며칠 동안 계속된 기도회를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소리 지르고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통성기도했다. 블레어는 "그 효과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소리와 정신의 거대한 조화가 이루어져 거부할 수 없는 기도의 충동에 의해 움직인 영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전에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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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무언가가 한국인의 원초적인 한을 건드려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우레와 같이 끌어올린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은 세계 최대의 복음주의 대형교회인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본거지이자 최고의 선교사 파송국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신 교수는 말한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기가 바뀔 때 식민지의 위협 속에서 살던 한국인의 절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비슷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존 케슬러는 그의 저서 <구약신학>에서 시편에는 찬양 뿐만 아니라 개인적, 공동체적 탄식의 시편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썼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야훼와의 관계라는 현실과 끔찍한 고통의 경험을 동시에 포용할 수 없는 신앙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바치는 시편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질병이나 고통에 시달릴 때, 죄와 죄책감을 표현할 때, 유배나 정복과 같은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등 다양한 상황을 다룬다. 시편에는 적을 향한 복수를 구하는 '저주하는' 말이 담겨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지어 다양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며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과 비슷한 정서를 느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열방에 흩으셨나이다"라는 시편 44편의 고라 자손들의 외침처럼 일제 치하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전쟁과 이념의 대치 상황에 끼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우리 어르신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11, 22절).

한과 같이 공동체의 애가는 단순히 어려운 시기에 개인이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공통의 역사로 엮어 부르는 슬픔의 합창이며, 해결되지 않는 절망의 현재적 고통 속에서 발화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해하게 된 한국의 한은 종종 격동하는 감정을 다른 사람이나 제도를 향해, 혹은 허공으로 향한다. 하지만 치유되고 성화 된 한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해, 한은 기도가 될 수 있다.

한에서 탄식으로

2005년 여름, 나는 두만강 중국 쪽에 서서 할아버지가 어릴 적 한국전쟁을 피해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가족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떠난 조국 북한을 바라보았다. 강은 생각보다 훨씬 얕았고 건너편 땅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지만, 북한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은, 어쩌면 여전히 내 민족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북한과 복잡한 인연을 맺고 있는 한인 청년들과 캐나다 한인들로 주로 구성된 우리 팀은 한마음으로 통성으로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고난과 가난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탈북민들이 있는 강을 바라보며 애통해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만난 북한 가족들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겪는 고통과 극심한 박해로 인해 슬퍼했다.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에 여전히 남은 상처와 치유할 수 없는 두 나라 사이의 분열을 위해 기도하며 한국어로 울부짖었다.

우리는 한을 품고 기도했고, 그 기도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등 다른 지역의 대를 이은 적대감과 슬픔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는 가운데, 나에게 한은 세계와 함께 애통하는 작은 다리가 되고 있다. 한이 기도가 될 때 우리가 마주한 공동의 슬픔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열방의 상처를 어루만질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서 애통해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의 사랑이 머무는 작은 성전"이 된다는 사실이다(N. T. 라이트). 어쩌면 이것이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신학자 니콜라스 볼터스토프는 <아들을 위한 애가>에서 "그렇다면 애통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새날을 엿본 사람, 그날이 오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아파하는 사람, 그날의 부재에 직면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억압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가 억압받는 것을 볼 때마다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안 속에 거하면 죽음도 눈물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애통하는 자들은 가슴 아파할 줄 아는 비전가들이다.

라이트와 볼터스토프는 신자로서 우리가 겪는 공동의 슬픔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을 때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잘 표현한다. 하나님은 상하고 낙담한 한을 품은 자를 축복받은 자, 희망으로 기름을 부어주는 애통하는 자로 변화시키신다.

한이 한국인 고유의 것이든 아니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함께 애통하는 법을 배우고, 애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애통하는 자들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이사야 53:3).

한국의 예술, 미디어, 문화에서 한을 접하거나 마음속에서 한이 꿈틀거림을 느낄 때마다 나는 기독교 부흥회에서 시작된 그 기원을 떠올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 얼굴 앞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애통하는 자들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치유하실 분께 나아갈 수 있다.

사라 경아 화이트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카피 에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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