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이 인생에서 배운 것은 헌신이 아니라 자유와 독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20대에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여자들과 데이트하는 법을 잘 알지도 못해요.” 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스틴으로 이사한 후 레이첼은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 큐피드’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는 싼 여자라서 무료였어요”라고 웃으며 그녀가 농담했습니다. 레이첼은 개종하기 전에 결혼을 먼저 했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은 마치 하나의 거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성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동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혼은 나라에서 발행해주는 하나의 종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신앙이 생기고 남부 침례 교회에 가입한 후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며 성스러운 관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후 자녀의 출생으로 인해 레이첼과 남편 사이의 사랑은 더 커졌습니다. 가족의 탄생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많은 남성이 여성과는 달리 직장, 결혼 및 가족을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그녀는 확신합니다. “저는 남성이 공급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레이첼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레이첼은 결혼의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실제로 레이첼의 남편처럼 결혼과 가족을 선택하는 남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인구 통계 조사에 따르면 25세에서 34세 남성 중 35%만이 결혼했으며, 2005년 50%와 비교했을 때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숫자들은 명확하고 무서운 궤적을 향해 갑니다.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사랑 또는 경제적 실용성의 이유로 지난 수천 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결혼에 관해 전통적,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여성보다 남성이 결혼에 더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념적이며 단기적 관계 안에서의 새로운 규범을 따르며 ‘선택권을 계속 열어두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우리 시대 결혼의 또 다른 새로운 방해물은 바로 전염병입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경험으로 몇 달간, 많은 결혼식이 지연되고 있으며, 모든 새로운 관계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결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기 훨씬 전에, 저는 사회학자로서 특히 교회 안에서 결혼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퍼져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결혼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결혼을 장려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에 대해 예외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길 권하는 전반적인 문화적 메시지에 어떻게 저항하고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 학문 분야에서 제가 생각하는 결혼의 개념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후기 윤리학자 돈 브라우닝은 학계에서 결혼은 이제 다른 단어와 같은 범주에 있는 기피단어로 간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점까지 추가되면 동료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처졌다는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계속 조사를 밀고 나갔습니다. 1년 동안 글로벌 리서치 팀과 멕시코,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 레바논, 나이지리아, 미국 등 7개국에 걸쳐 약 200명의 교회 청년들과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이름은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인터뷰 대상자는 최근 결혼했거나 약혼했지만 대다수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27세였습니다.

연구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회의론은 서구를 넘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멕시코 시티에서 모스크바, 베이루트에서 라고스까지도 퍼져 있었습니다. 자료를 연구하고 흩어진 퍼즐 조각을 모으면서 전 세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결혼과 관련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선택, 더 많은 선택, 더 큰 유혹, 더 높은 기대, 지속적 불안 및 고질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결혼 과정에 관한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제도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직면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의대를 다니는 25세 안데르는 곧 결혼합니다. 의사인 동료와 6년 동안 교제한 후 결혼하는 이 남자가 결혼 전에 확신이 넘칠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 두려운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구속되고 타협해야 하니까요.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르는 것들이 있겠죠.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문제가 될 겁니다.” 그에게 정확히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지 묻자 “부부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발생합니다. 배우자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를 겁니다.” 6년간 교제했으면 누군가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않냐고 내가 그에게 묻자 “전 그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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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는 자신의 신앙을 지지해주는 성도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배경이 자신의 고민에 관한 충분한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 전에 느끼는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불안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안이 자신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병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좋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 섭니다.”

안데르는 결혼율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 남자 중 한 사람입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조사한 7개국의 교회 성도들은 거의 모든 연령대에 거쳐 결혼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예측 결과는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폴란드 여성의 76%는 30세에 결혼하고, 35세는 88%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미국과 스페인에서 같은 연령의 여성보다 약 10% 높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교회 성도들과 비성도들 사이의 결혼 격차는 특히 두드러집니다. 미국에서는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남성의 72%가 35세에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미국 남성은 50%만이 결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관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14년 제가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오스틴 연구소가 한 전국적 설문 조사에 따르면 20세에서 39세 사이의 자칭 복음주의자 중 56%가 현재 결혼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수치는 같은 연령 인구가 기록한 42%를 훨씬 상회합니다. 4년 후에 실시된 조사에서 수치는 명백히 하락했습니다. 2018년 후반에 복음주의자 20~39명 중 51%가 결혼했으며, 전체 인구의 40%가 결혼했습니다. 숫자는 여전히 높지만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거하고 있다고 말한 복음주의자들은 같은 기간에 3.9%에서 6.7%로 증가했습니다. 동거를 지지한다고 밝힌 이들은 2014년 인구의 16%에서 2018년 말까지 27%로 증가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복음주의자들 중 소수만이 결혼이 ‘낡은 인식’이라고 말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은 결혼을 대체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공식 교회 통계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백한 감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간행물인 교회 통계연감을 살펴보면 미국의 가톨릭 결혼은 1965년 이래로 10개의 장례식마다 9개의 결혼식이 있었으며, 59%가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에는 이 비율이 10대 3.7로 감소했습니다. 평균 연령이 40세 미만인 젊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는 한,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요인 중 하나는 안데르와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적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부부가 서로 더 헌신할 수록 의심은 줄어들며, 특히 재정과 관련된 경우에 그러합니다. 결국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으로 함께 좋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전도서 4:9~12).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더는 이런 식으로 결혼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국가를 불문하고 물질적, 사회적 또는 심리적 불확실성을 종식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서 만난 29세의 정통 기독교인 빅터를 포함해 인터뷰한에 응한 많은 사람에게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을 갖고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복잡 해집니다. 아내가 불안정하거나 불행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할까? 작고 후진 집에 살 수 있을까? 현대 대도시의 상황에서 가족을 만든다면 여러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겁니다.”라고 빅터가 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라는 전염병이 어떻게 퍼졌는지에 관한 것은 성 혁명, 축소된 경제 또는 표준 이하의 남성 등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면, 결혼 생활에서 얻게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결혼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이제 성인이 되는 기본적인 관문이 아닌 성공적인 삶을 증명하는 하나의 주춧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구조물을 마무리하려면 주춧돌이 필요한데, 결혼이 바로 그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가 있어야 건물이 세워지며, 이 과정에서 마모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 재정이 가난한 상태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만, 이는 젊은 시절에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고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아직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신호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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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무어는 그의 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폭풍 속의 가정>에서 탄식하면서, 결혼이 자기희생이 아닌 ‘자아실현의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미시간 출신의 27세의 클로이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했습니다. “20대 때에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죠.”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만연한 이 관점으로 본다면 결혼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희생은 30번째 생일 즈음에 자연스레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닌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제도의 위기는 발전된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라고스 출신의 28세 미혼 오순절파 교인 디디는 분명한 결혼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을 때”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목표한 모든 것을 성취한 다음 결혼을 할 거예요.” 라고스 출신의 또 다른 24세 미혼 여성도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오 제발! 결혼으로 인해 고통받을 수 없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생에 대한 낮은 관용을 나타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고 싶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이야기에 주저했지만, 실은 이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따르지 않은 한 부부는 미래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 중인 폴란드인 가족의 사례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24세 파웨와 29세 마르타는 현재 크라쿠프에 거주하는 부부입니다. 마르타는 한 살짜리 딸을 키우는 주부이며 파웰은 인근 대학의 철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크라쿠프의 이 부부는 여러 방법으로 현실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르타는 결혼식이 온 동네 사람들의 축제로 여겨지는 작은 마을 출신인데, 두 사람은 작은 결혼식을 하기로 결정해 돈을 절약했지만 그로 인해 사회적 유대를 시험 당하기도 했습니다. 파웨는 “우리가 큰 피로연을 열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파웨 부부는 친구와 이웃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결혼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이 이전과 바뀌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마르타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20-30년 전과 비교해 현재의 결혼은 위안을 찾기 위한 목적이 더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가족과 부모 때를 생각해보면 그때는 돈이나 집이 없이도 시작했죠.”

그녀와 파웨는 현대의 트랜드를 따라가지 않고 결혼에 대한 전통적이며 기본적 관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하는 삶은 쉽지는 않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외면하는 ‘창조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들처럼 현실적이고 기본에 충실하며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접근하는 부부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은 점점 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지고, 더 이상 전 세계 성인 대다수가 선택하고 누리는 관행으로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 특권층만이 선택하는 자발적이며 소비 지향적인 행위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결혼을 통한 이점은 두 사람의 부와 소득을 통합한다는 점이 있는 반면에, 서로에게 경제적 도움이 못 되는 경우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을 통해 사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할까요?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물론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반드시 문제는 아니며 강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점은 결혼을 늦게 할수록 결혼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더 적은 수의 사람들만 결혼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결혼율이 줄거나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여성들이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다리기 지쳤다”라는 말을 자매들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대부분의 성도 중에는 결혼에 관심이 있는 여자의 비율이 남자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 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추세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이는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은 능력이 적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며, 그 힘은 섹스를 포함하여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이러한 역동적인 상황은 그들을 이중적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나는 결혼을 약속할 만한 상대와 혼전에 잠자리를 가져도 될까? 아니면 혼전순결을 지키고 그가 날 떠날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등의 고민을 자매들은 하게 됩니다.

유엔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25세의 레바논 여성 파라는 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지만 배우자를 마냥 기다리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파라와 같이 레바논에서 대부분의 미혼 성인 자녀들은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성직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사는 아파트의 많은 부부에게 조언을 해주는 분입니다.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그녀도 대화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녀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구혼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독실한 레바논 여성들이 시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 베이루트시에서 살기 위해 월급을 초과하는 엄청난 생활비가 들기 때문에 레바논의 기혼 여성들은 미혼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곤 합니다. 또한, 여가 시간에는 가사를 돌봐야 할 책임까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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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우자가 모두 일하고 귀가하면 피곤한 상태죠. 아이들을 갖기 전에도 부부는 함께 앉을 시간이 없어서 미루게 되는 것 같아요. 토요일이나 주말까지 밀린 일을 하느라 과부하가 걸리고 매우 피곤합니다.”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따라서, 파라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결혼의 모습이 바뀌고 있어요”라고 파라가 말했습니다.

이러한 역동적 변화는 레바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들은 서로의 커리어를 지원하고 평등한 부모로 양육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많은 영역에서 희생하기를 서로에게 기대합니다. 이러한 조건 중 일부는 경제적 부담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지만 내부적으로 생성되고 선택적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고자 한다면 사회 심리학자인 엘리 핀켈이 이름 붙인 결혼의 “숨 막히는 구조”에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결혼을 말하다>의 저자인 팀 켈러도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은 결혼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관점을 생각할 때, 결혼 생활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할 때 애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상호 제공하는 공식화된 성관계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결혼에 여전히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이지 않고 구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결혼은 오랫동안 배우자들 사이의 불평등한 교류에 의존해 왔습니다. 남녀는 서로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 개념에 많은 사람들이 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결혼의 기본이 전문화와 교환의 의미라면 결혼은 점점 시대착오적인 사회적 형태로 보입니다.”라고 UCLA의 인구 학자 발레리 오펜하이머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결혼율의 감소가 그녀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실망할 일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법적 노력은 결합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혼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택권, 기술, 성 평등, ‘저렴함’ 성행위, 세속화가 증가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연구자로서 결혼의 소멸을 연구하는 것은 파고든 곰팡이가 서서히 오래된 참나무를 천천히 파괴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좋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습니다. 참나무는 멸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결혼은 점점 더 ‘기독교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연구 조교와 함께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성스러운 용어로 묘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레이첼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가정 교회, 독창적인 연합, 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연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답변에 만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저서 <결혼론>에서 그는 결혼을 인간 사회의 첫 번째 자연적 유대라고 확언합니다. 실제로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가지 선함’ (신실함, 후손, 성례)의 일부를 참조하여 결혼을 정의했습니다.

이 세 가지 선함은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관행이 무시되거나 훼손될 때마다 결혼제도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세속적 동료들보다 이 선함을 위해 더 헌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이 결혼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결혼제도가 서서히 ‘기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서구 국가의 세계 가치관 조사의 수치는 이를 상당히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위 표 참조]. 결혼 패턴에서 보여지는 성도들과 비성도간의 차이가 수십 년 후에는 훨씬 더 큰 차이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결혼은 세계적으로 종교적인 이슬람교도, 정통 유대인,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점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설문 조사는 동시에 좋은 결과와 안 좋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 결혼에 더 많이 실패하기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행인 점은 여러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결혼에 대한 중대한 사회적 지원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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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고되고 희망적인 공간에는 결혼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놓여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지. 그러나 무언가를 바꾸어 나가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어.” 나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가 현명한 말을 했습니다.

서구의 세속화가 결혼 생활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결혼의 수호자가 된다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교회를 보호하고 장려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연구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사교회(parachurch) 조직의 역할 또한 중요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의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목회적인 노력에 대한 설교는 종종 들었지만 일관된 성공담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특히 미국에서)은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짝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지만(그 중 그리스도인을 선호) 사람들은 알고리즘을 통한 짝짓기 보다는 실제 사람을 통해 소개받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중매인은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활기 넘치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과정을 겪으면 만족도가 컸습니다. 교회의 회중은 종종 규모가 너무 크고, 소규모 그룹은 너무 작고 선택권이 없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중간 규모의 공동체가 가장 적합합니다. 기독교적 공동체가 갖고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때로는 문화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또래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연령이 늦어짐에 따라 대학 졸업 후 사회에서 생성되는 중간 규모의 공동체 모임이 결혼의 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크라쿠프에서 결혼한 부부인 파웨와 마르타는 두 가톨릭 단체가 결혼 전후에 그들의 결혼을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인근 도미니카 공화국의 청소년 단체였으며, 다른 하나는 폴란드, 레바논 및 스페인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이 언급한 최대 50명으로 구성된 교회 기반 공동체의 운동인 신교리교육운동(Neocatechumenal Way)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본국의 기독교학생회 및 감리교 학생선교회와 같은 대학 조직에 대해 들었습니다.

즉, 젊은 그리스도인이 외로움이 아닌 거룩함에 초점을 맞췄을 때 배우자를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간단하고 생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CS 루이스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을 겨냥하면 땅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 모두 결혼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비 불균형은 지속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신앙과 제자 훈련에 집중한다면 결혼 생활에 유익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결혼의 시작은 개인적 방식과 축적된 경험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 러시아 인터뷰 대상자가 언급한 것처럼 타인의 나쁜 사례는 ‘결혼에 대한 일종의 백신 역할’을 합니다. 대조적으로, 좋은 예는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범적인 이야기만 하며 결혼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하거나 포장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기대합니다. 어떻게 정의하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공동체 훈련을 통해 전통을 강화하는 것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달 만에 결혼하는 과달라하라 출신의 34세의 학교 상담사인 토마스는 이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는지는 강한 인상을 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부부관계가 아름답다면, 정말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나도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열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결혼을 우상화 하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시키는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C.S.루이스의 “천국을 향한 목표”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결혼의 본질을 생각하고 결혼에 대한 오늘날 만연한 세상의 물질적, 심리적 기대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결혼은 부활의 때 하늘에서는 없을 지상에서의 일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2:30).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번영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일상에서(또는 매 순간) 희생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타낼 기회가 되며, 영적 진보를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제 서구에서는 젊은이들은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수많은 희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결혼 생활이 건강한 사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 여러 면에서 배우자와 자녀 뿐만 아니라 가정 밖의 세상을 향해 실질적(그리고 영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서구사회의 성공은 가족의 사회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를 해체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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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을 향해 결혼이 무엇인지 설교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에 대한 영원하며 탁월한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멋진 과업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실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마크 러그너러스 (Mark Regnerus)는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의 사회학 교수이며 오스틴 가족 및 문화 연구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이다. 그의 새 저서, <기독교 결혼의 미래>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91일에 출간된다.

번역 CT코리아 박주현/Translated by Juhyun Park of C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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